마라톤, 나를 찾아서

100km 울트라 페메기-천진암울트라 후기

늘근피터팬 2011. 5. 24. 16:57

100km 울트라 페메기-천진암울트라 후기.

  이걸 두고 ‘아름다운 꼴찌’ 라고 해야 되나? 골인 시간 15:33:45. 그래도 대회 종료시간이 25분 이상 남아있으니 뒤로 3~4명은 더 들어올 줄 알았다. 그런데 정말 시간외 완주자 네 분을 빼고는 꼴찌였다. 이것이 나의 100km 첫 페메기의 성적표다. 나는 아직 안정감 있고 든든하게 느낄 수 있도록 마라톤 페메를 하기에는 경력도 짧고 기량도 턱없이 부족하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누구를 페메 해본 건 10km 두어번과 각시를 2:27분에 하프 통과시킨 게 전부다. 그런데 풀코스도 아닌 100km 페메를 어쨌든 성공했다.

  얘기는 작년 겨울 쯤 시작됐었다. 금요일 정모 훈련이 끝나고 맥주집에서 한잔 하는데, 동석한 형님들 두 분이 무모하리만큼의 빠르고 과감한 나의 도전을 부러워하시며 자신들도 꼭 한번은 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런 욕구가 있으시면 한번 도전해보시라고 꼬드겼다. 나는 남들에게 이해관계가 조금이라도 얽혀있는 얘기라면 할 줄도 모르지만, 내 이익과 무관한 일에는 발 벗고 나서는 스타일이다. 따라서 그 이후로 머뭇거리는 형님들을 계속 꼬드겼다. 그러나 나는 현재 우리 클럽에서 제일 뉴스메이커일지는 몰라도 아직은 1등병 정도의 위치밖에 안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행동하려는 면이 많다. 또한 요즘은 열심히 안하시지만 한때는 울트라마라톤을 20여회 이상 완주하신 형님이 계셔서 체면과 위상을 생각해 한번 더 앞장 서 주시기를 요청했었다. 그런데 이 형님이 어려운 가정사가 얽혀 있어 시간을 내지 못하셨다.

  이렇게 연습다운 연습도 제대로 못한 상황에서 시간은 흐르고 확신들이 없으신지 계속 머뭇거리신다. 그래서 맘먹었을 때 밀어붙이라며 계속 다그쳤다. 그런데 어디서 들으셨는지 “코스가 너무 위험다다더라.” “코스가 험하다더라.” 하시면서 이제는 열리지도 않는 서울마라톤클럽에서 주최한 한강을 달리는 대회와 비교하신다. 그래서 그 대회는 열리지 않을거라고, 또 천진암 만큼 서울에서 가깝고 한적한 코스도 별로 없다고 해도 믿으려하지 않는다.

  내 신조야 뭐든 시작하면 죽을 각오로 하고, 죽고 사는 걸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지만 남에게까지 강요할 순 없다. 그래서 내 생각은 이렇다. “비 오는 날 벌판을 달리다가 벼락 맞아 죽을 확률이 십만분의 일이라면, 집에 가만히 있어도 산사태 나서 덮쳐 죽을 백만분의 일의 확률도 있다. 비록 열 배 차이일망정 십만분의 일 정도라면 무시하고 나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 고 대꾸했다. 그런데 한번은, 그러다 정말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책임지려고 그러느냐는 말까지 들렸다. 이 말을 듣고는 정말 맥이 탁 풀렸다. 내가 형님들한테 강요 아닌 강요를 한 거라면, ‘아우님’ ‘아우님’ 하시면서 인정해 주고 한번 해봤으면 하시기에 용기를 실어드리고 싶었을 뿐인데......

  우여곡절 끝에 네 분이 접수를 하였다. 접수한 네 분 중 두 분은 풀코스 기록도 좋고 승부근성이나 지구력이 있으신 분들이라 계기만 만들어지면 성공할 분들이라 생각해 별 걱정이 없었다. 그런데 두 분은 4시간대 중반의 기록들에 연습량이나 끈기 스피드 모든 게 확신이 안 서는 분들이다. 그런데 그중 한 분이 집안 일로 출전을 못하겠단다. 너무 어려운 게임 같아 부담이 됐었는데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시간이 맞는 형님들과는 한 분씩은 몇 번 연습주를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대회 2주를 남겨두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딱 한번밖에 못했다. 우리 동네에서부터 강북 강변을 따라 동호대교까지 갔다 오는 60km 정도의 거리였다. 제일 기량이 뛰어난 큰형님은 며칠 전부터 무릎이 이상하다 하시더니 결국 돌아오는 도중에 포기하고 택시를 타셨다. 그리고 결국은 이 부상 때문에 출전을 포기하셨다. 또 한 형님은 발가락 하나가 좀 이상이 있긴 해도 출전만 하면 홀로 완주하시는데 별 이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대회 당일 아침에 그 발가락이 부어올라 출전을 포기하셨다. 이번 대회에서 함께 완주하신 형님은 끝까지 불안하고 부담스럽게 만드셨다. 남들은 동호대교까지 갔다오는데, 동작대교에서 돌아갔는데도 중간에서 식사하고는 같이 걸어서라도 가자는데 결국 버스를 타셨다. 그러니 경험자 입장에서 볼 때 완주에 대한 확신도 안서고 나에게도 부담으로 다가왔다. 처음엔 계기만 만들어주면 내 역할은 끝날 거라 생각했는데, 완주하고 못하고까지 신경써야하는 입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포기한다는 말씀이 나오길 기다려졌다.

  이렇게 확신 없고 부담스러운 마음을 숨긴 채 명랑하게 떠들어대며 내 차로 모시고 일찌감치 대회장에 도착했다. 나야 쏟아 붓는 빗속을 오랫동안 뛰어본 경험이 몇 번 있으니 이깟 보슬비쯤이야 대수롭지 않지만, 형님 때문에 걱정이다. 우의를 걸치고 잔비를 맞으며 대회는 시작되었다. 천진암을 찍고 15km 쯤의 거리에서 가지고 있던 빵을 나눠먹고 계속 전진이다. 속도는 빠르지 않지만 30km 정도까지는 약간 앞섰다가고 다시 나란히 뛰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갈수록 속도가 느려진다. 이제 앞서서 걷다 뛰다를 반복하며 따라오라고 무언의 압박을 가한다. 그렇게 35km CP에 도착해 먹거리를 충분히 챙겨 먹고 다시 전진이다. 40km 지점의 긴 고개를 빼고는 내리막에서는 그래도 뛰었다. 그러나 걷는 속도나 뛰는 속도가 워낙 느려서 50km 지점을 7시간 걸렸다. 안되겠다 싶어 58km CP를 늦어도 8시간 안에는 통과해야 된다고 얘기하며 뛸 수 있으면 좀 더 뛰자며 이끌었다. 다행히 느린 속도로라도 따라오신다. 그렇게 58km CP를 8시간에 턱걸이 하며 도착했다. 밥 생각이 없다 하시는데 억지로라도 드시라고 권해, 밥 먹고 물 보충하는데 7분을 쓰고 곧바로 일어나 출발했다.

  남은거리 42km에 7:50분이면 10km를 1:50분 안에만 통과해도 되는데 이마저도 불안하다. 내 걷는 속도가 빠르긴 해도 뛰어서도 따라오질 못한다. 그러니 뛰는 속도가 1:40분정도 밖에는 안 된다는 얘기다. 거기다 걷는 속도는 더욱 느려 2시간도 더 걸릴 것 같다. 그러니 2~30m 앞서 걸으면서 느리게라도 계속 뛰게 하는 수 밖엔 없다. 셀 수 없이 우측으로 뒤를 돌아보는 통에 고개가 우측으로 5도 쯤은 기울어졌을 것 같다. 80km가 넘어서면서 부터는 고관절이 아파서 못 뛰겠다고 하시는데, 진통제 하나 건네 드린 것 빼고는 달리 도울 방법이 없다. 마음이야 끌어주고 밀어주고라도 싶지만, 해서는 안 되는 일이고 형님도 원치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고통스러워 하시면서도 의지를 꺾지 않고 아주 느린 속도로라도 다시 뛰시는 게 다행이고 대견스럽다. 그래서 형님은 점점 더 힘들어 하시지만 막판으로 갈수록 시간내 완주라는 희망이 보인다. 그렇게 힘들게 힘들게 91km 지점을 지나는데 정해선, 정희경, 오성훈 선배님이 맛있는 음식들을 준비해두고 기다리신다. 너무 아파 힘들어하시는 형님을 보고 정희경 선배님이 지압을 해주신다. 나한테 도와주지도 않고 뭐했냐 하시는데, 뭘 알아야 해드리지. 이래저래 난 아직 멀었다. 여하튼 이번 대회에서 형님이야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우셨겠지만, 덕분에 나는 형님을 시간 내에 완주시켜야 한다는 부담감 빼고는 아주 여유롭게 즐긴 것 같다. 그래서 예전 같으면 별로 귀에 들리지도 않을 개구리 울음소리며, 꽃내음, 남한강의 풍경들을 맘껏 감상했다. 누군가가 고통을 받으면 누군가는 그 반대급부의 호사를 누리는 이치인가?

  9km 남겨놓고 2:05분, 이제는 안심해도 될 것 같다. 그러나 내리막에서는 두어번 만 더 뛰자고 얘기한다. 이제 잠시 후면 골인이다. 형님께 옷매무세를 갖추고 멋진 골인 동작도 준비해두시라고 얘기한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못 믿겠던 형님이 지금 이 순간 너무 멋지고 대견하다. 그리고 뿌듯하다. 그렇게 골인을 하고 형님은 여러 가지 포즈로 사진을 찍으셨다. 나는 산전수전 다 겪은 아버지 마냥 사진 찍는 폼이 괜히 무덤덤해진다.

  대회 감독을 하시면서도 만나는 족족 따뜻하게 챙겨주시던 회장님께서 한 말씀 하신다. “시각장애인을 안내한 오인수씨와 김환철씨는 가슴이 많이 힘들었을 것.”이라고...... 이 심정을 형님이 제대로 아시려나......

  조직위원장님, 심규화 감독관님, 안마클, 강남지맹과 또 많은 자원봉사자 분들과 함께 한 많은 달림이 분들......
덕분에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