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과 나
마라톤과 나.
생각만 해도 고통스럽고 자신 없는 마라톤이라는 걸 시작한지 딱 2년 하고 1개월이 지났다. 원래 운동에는 소질이나 취미가 별로 없던 사람이 4반세기 넘는 세월을 술 마시기와 담배피우기 운동만 하다가 자신감 없이 시작한 마라톤이었다. 운동에는 워낙 잠뱅이였던지라 힘든 마라톤을 제대로 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확신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긴 시간동안 105리 먼 길을 달린다는 것에 대해 구도자적, 철학적, 또 극기[克己]에 대한 환상이 나를 강하게 이끌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에만 담고 있던 마라톤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구도자 고행하듯, 몸으로 철학을 공부하듯, 그렇게 천천히 달리기 수행을 시작하였다. 이렇듯 나의 달리기는 건강보다도 나를 찾고자하는 하나의 수단과 방법으로서의 의미가 더 컸다. 그런데 답이 없는 철학적 의미의 나를 찾는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결국 극기의 수단만이 강조 되어, 자신 없어 조심스럽게 접근했던 나도 놀라고, 마라톤 동호회 동료들도 모두 놀랄 만큼의 숨가쁜 결과들을 만들어냈다.
마라톤 시작 6개월이 되기 전 첫 풀코스 도전에서 3시간 52분의 기록을 달성하고, 한 달 뒤에 또 13분을 단축했다. 9개월째에 오산종주산악마라톤을 완주하고, 1년이 되기 전에 100km 울트라마라톤을 완주했다. 2년이 되기 전인 한 달 전 9월 9일부터 사흘 밤낮을 자지 않고 달리는 ‘한반도 횡단 308km 울트라마라톤’에서 사흘 내내 쉬지 않고 억수로 퍼붓는 비를 맞아 온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가면서도 끝까지 달려 62시간 18분에 완주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번갯불에 콩 볶듯 자기 임기 중에 다 해치우겠다고 무린한 속도전을 벌이는 정치 모리배들처럼, 나 또한 초심과는 달리 본래의 의도나 목적에서 크게 벗어나 총알택시 손님 모시듯 성급한 결과지상주의에 빠져가는 건 아닌가 하는 자문도 해본다.
그러니 마라톤을 오래하고 실력이 쟁쟁한 이들도 할 말을 잃고 혀를 차며 ‘괴물’이라고들 말한다. 각시는 “그게 어디 오기지 마라톤이냐.”며, 동호회의 ‘오기’라는 이름의 형님과 이름을 바꾸어버리란다. 어쨌거나 처음에 기대치를 너무 낮게 두고 시작한 것에 대한 반작용이었는지 너무 큰 성과들을 거두었다.
한반도 횡단 완주 후의 물집 잡힌 발
한반도 횡단 종료 40시간 후의 부은 발
그러기에 마라톤에서의 대단한 자랑거리에도 불구하고, 살짝 떨어져 나 자신을 조망해 보려 하는데, 아직도 막연하고 불확실할망정 내가 꿈꾸어 왔던 이상이나 이미지하고는 많이 벗어나 있다는 느낌도 든다.
조금 살아오면서 느끼는 건데, 나는 실리주의적 현실성이 약하고 약간 덜 떨어진 유형이면서도 실속 없는 명분은 좋아하는 사람 아닌가 싶다.
또 앞에 나서서 남자다운 과시(멋지게 말하면 카리스마, 말 돌리지 않고 내 맘 그대로 속되게 표현하면 ‘꼰대’)하기 보다는(하기 싫어서 안 하는 건지, 못하니까 싫어하는 척 하는 건지 모르지만), 조금 삐딱한 영화나 만드는 국외자이거나 염세주의적 성향의 부조리주의자이고 싶었다.
아니면(어린애 같은 얘기지만) 초연한, 고고한, 도도한 한 마리 학처럼 살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그러기에는 나의 피의 온도 변화가 크고 정적인 걸 추구하면서도 그다지 고요하고 긴 호흡의 성격이 아니라는 혼란을 겪는다. 이렇듯 아직도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방황자의 한 사람으로서 마라톤에서의 성과만큼이나 그로 인해 묻혀가는 반대적인 질문과 회의도 강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