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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나를 찾아서

성지순례 222km 울트라1 - 마라톤이 맺어준 인연들

성지순례 222km 울트라 후기1 - 마라톤이 맺어준 인연들.

  아직 대회가 끝나지 않은 일요일의 하늘은 너무 어이없고 맹랑하다 싶을 정도로 맑고 투명하다. 어제는 마치 천둥번개의 신이 광란의 춤이라도 추듯이 하루 동안에 5만 번 가까운 낙뢰를 때리며 봄비답지 않은 많은 비를 24시간 이상 퍼붓더니, 언제 그랬냐 싶게 딴청이다. 참,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이런 천재지변이라는 훼방꾼 때문에 끝까지 완주를 못했지만, 덕분에 할 얘기는 많아졌다. 예전에 후기를 여러 번 써 본 터라 대회 시작 전에는 별 할 얘기도 없을 것 같고, 또 식상할 것 같아 이번에는 후기를 안 쓸 생각이었다.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이 쉬지 않고 퍼부어대는 폭우와 천둥번개 소리를 들으며 달리다보니 또 다른 할 애기들이 넘쳐난다. 또한 아무리 많이 달려본 사람이라 해도 긴 시간, 긴 거리를 달리다보면 항상 새로운 많은 얘기들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올해는 벌써 내 능력을 한참 넘어섰다 할 만큼 많은 대회를 치뤘기에 이래저래 망설이다가 엉거주춤한 상태로 별 준비도 못하고 대회에 참가했다. 따라서 자료상으로 조차도 이 대회의 특징이나 코스조차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하고 너무 막연한 상태로 대회에 임했다. 그러면서도 무슨 배짱인지 객기인지 아니면 게으름에 대한 자기 합리화인지 모르지만, 미래의 더 큰 대회를 위해 치밀한 준비 없이 허술하고 막연한 부딪침 속에서 고통도 당해보고 깨지며 느껴보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회 전 일기예보에 비가 내린다 하니 내심 좀 더 많은 경험과 시행착오를 맛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훨씬 힘들긴 해도 맘껏 즐기고 느끼는 시간을 갖기로 맘먹었다.

  대회 당일 저녁 7시경에 대회장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가마동’ 회원이자 이번 대회 조직위원이며 내가 속한 ‘화정마라톤’의 대 선배로서 성지순례며 한반도횡단 등 일찍이 울트라의 길을 열어놓으신 박진순 선배가 왜 안 오느냐고 전화를 하신다. 딱 2년 7개월 전이다. 처음 마라톤 클럽에 가입해 이 선배님의 이력을 보니,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싶었다. 그래서 무척 궁금하고 만나고 싶었지만 이때 이미 이 선배님은 집을 이사하는 바람에 클럽에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그 뒤 우리 클럽의 큰 행사 때는 몇 번 만나고, 또 내가 울트라를 처음 도전할 때와 횡단 도전할 때에는 전화로라도 많은 걸 묻고 배웠었다. 그런데 이번 대회에서는 진행자와 선수로 만나 여러모로 따뜻하게 후배를 챙겨주신다. 아! 이 든든함. 세상 사람들아, 나에게도 빽(배경)이 있단다.

  밤 아홉시에 명동성당을 출발해 때론 행인들 속을 헤집고 복잡한 길과 지하도를 통과하며 전진이다. 건널목을 건널 때마다 같이 기다리게 되니 ‘서소문성지’ ‘당고개성지’ ‘새남터성지’까지는 거의 한 무리로 달린다. 그러니 한강으로 진입하기 전까지의 복잡한 주로도는 숙지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또한 진행요원들이 앞서 이끌어주면서도 주변 지하주차장 차들을 신속하게 통제해주는 모습들은 꽤 능숙하고 이력 있어 보여 좋았다. 한강둔치로 빠져나와서부터는 ‘절두산성지’에 다다르기 전부터 대열이 흩어지기 시작한다. 양화대교를 건너, 아직은 달려온 길이 20km도 안 될 거리인 안양천 초입에서부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금세 빗발이 굵어지니 우의를 꺼내 입고 달린다.

  그렇게 또 한참을 달려 30km지점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우리 지맹의 많은 회원님들이 각종 먹거리들을 준비해 오셔서 봉사를 하고 계신다. 주먹밥에 따뜻한 매실물과 커피까지 한잔 마시니 속이 든든하다. 그런데 후라이팬에 불고기 굽는 걸 보니 배낭 내려놓고 같이 어울려 한잔 하고 싶다는 생각에 침이 넘어간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봉사하시는 동료들과 헤어져 다시 길을 재촉한다. 또 계속 안양천을 달리다가 안양 시내로 접어들어 약간 길을 헤맨 끝에 42.7km 지점의 CP인 ‘수리산성지’에 새벽 2:34분(소요 5:34분)에 도착했다. 여기서는 인절미와 비타민 음료를 주기에 먹어둬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에 인절미 서너개를 꾸역꾸역 몰아넣고 비타음료를 마셨다. 그리고 박진순 선배님의 도움을 받으며 옷을 껴입고 여러 주자와 함께 출발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급경사의 산길을 후레쉬를 비춰가며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체한 것처럼 윗가슴이 너무 답답하다. 결국 한밤중에 폭우가 쏟아지는 산 속에서 외톨이가 되어 쭈그리고 앉아 손가락을 집어넣어 두번을 토해냈다. 그런데 물만 나오고 건더기는 나오질 않는다. 그러니 답답함 완전히 가시진 않아 그 뒤로도 종일 별로 먹을 수가 없었다. 아까 42.7km CP에서 추위속에서 떨며 몰아넣은 인절미가 체한 모양이다. 거기에 비타음료는 입맛에 맞지 않아 평소에도 잘 안 마시는데 괜히 마셨나하는 후회도 된다. 그래도 이젠 이정도의 문제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마음의 여유를 갖으려 한다. 제주 대회 등에서의 경험처럼 시간이 좀 흐르면 안정될 것이고, 또 나는 매번 초반의 위기 뒤에 후반에 강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지금 이 순간 흔들림 없이 나를 믿는다.

  한참을 앉아서 안정을 좀 찾은 뒤 나 홀로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도저히 가는 길에 대한 확신이 서질 않아 전진할 수가 없다. 다시 한참을 쭈그리고 앉아 기다린 끝에 뒤에 오는 두 명의 주자를 만나 함께 전진한다. 이렇게 두 분을 따라 어렵지 않게 수리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안양 시내에서 길을 찾기 위해 가로등 밑에서 지도를 펴든 얼굴을 보니까 같은 지맹의 형님들이시다. 내가 지맹 가입한지 얼마 되지 않는데다가 자주 만지질 못해 목소리만으로는 상대를 쉽게 알 수 없어 산 한 개를 넘도록 몰라봤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