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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나를 찾아서

빛고을 울트라 후기 - 기관 고장

빛고을 울트라 후기 - 기관 고장.

상업적 성공의 영향일망정 전 지구를 들썩거리게 하는 축구를 예술에 비유한다면, 찰랑찰랑 넘실대다가도 한 순간에 봇물 터진 듯이 몰아붙이고, 썰물 빠지듯 고요해지는 교향곡에 비유하면 어떨까 싶다. 아니면 다양한 얘기들로 살이 붙여지는 소설로 칠까?

합중국 미국적인 포지션의 경기 야구는, 투수와 타자가 남녀 주인공처럼 주고받다가, 갑자기 오케스트라석 지휘자(감독)의 신호에 맞춰 군무(힛앤드런)가 펼쳐지는 발레나 뮤지컬에 비유하면 어떨까? 구조적으로 짜 맞추는 희곡은 어떨까?

그렇다면 마라톤은? 언어가 사라진, 절제된 동작, 절제된 색채로 이루어진 판토마임과 비유한다면 너무 자폐적 관점일까? 내면 깊숙이 누르고 눌러 담은, 고도로 응축된 한편의 시라면 너무 관념적 해석일까?

그리 많은 횟수와 오랜 경력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젠 100km 울트라 정도는 그리 긴장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는 비교적 편한 마음으로 대절버스에 몸을 싣고 교요한 마음으로 독서를 즐기며 울트라 여행을 떠난다.

대회장에 도착해 구면인 여러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출발이다. 기온은 크게 높진 않은 것 같은데 습도는 무척 높다. 땀은 많이 흐르는데, 그렇다고 너무 급수를 많이 하면 배에 탈이 생길까봐 너무 많이 마시지 않으려고 신경을 쓴다.

오늘은 초반에 너무 오버해서 후반에 힘들고 경우에 따라서 완주를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시험 삼아 처음부터 스피드를 내보기로 했다. 10km 지점을 57분 정도에 통과하고, 20km 지점을 2시간에 통과하고, 25km 지점에서 200m 정도를 알바하고 30km 지점을 3시간 10분경에 통과했다.

5.18 국립묘역을 지날 때는 길 양쪽 가로수에 열사들을 추모하는 현수막들이 빽빽하게 걸려있다. 어릴 적 보았던 상여의 긴 만장행렬을 보는 것처럼 숙연해진다. 이게 바로 5월의 광주일런가.

28km 지점부터 슬슬 아프기 시작한 배가 점점 심해진다. 뛰면 배가 뒤틀리고 힘을 쓸 수가 없어 시간 단축할 수 있는 내리막에서도 달릴 수가 없다. 버스정류장에서 3번을 1~20분씩 누워있기를 반복하며 좀 우선하면 다시 달렸다. 그러다보니 자상하고 여유 있게 손아래 동서를 리드하며 달리시는 심성기 선배님과 여러 번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결국 30km지점에서 50km 지점의 CP까지 3시간 30여분을 소모하며 6시간 45분 만에 도착했다.

곧바로 밥 한술 뜨고 길게 깔아놓은 매트리스에 누워있자니 땀으로 젖은 옷 때문에 춥다. 매트리스 끝 쪽으로 이동해 끝을 잡아당겨 덮고 한 시간 여를 누워있었다. 사람들이 다 출발하고 홀로 남은 나에게 조직위원장님이 안될 것 같으면 회수차량에 타란다. 나는 뛸 거라니까 옆에 계시던 김채기님(작년 횡단을 같이 한)이 빨리 출발하라신다. 그렇게 대회종료 7시간 15분을 남겨두고 50CP에서 맨 꼴찌로 출발했다.

초반 위기를 극복하고 후반에 속력을 내어 완주한 경험이 몇 번 있기에, 배 아픈 것만 갠다면 아직 다리는 멀쩡하니까 충분히 완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긴 유둔재를 걸어서 올라 뛰어보려는데 그래도 배가 아파 힘을 쓸 수가 없다. 전력 질주를 해야 시간 안에 들어갈 수 있는데, 힘을 쓸 수 없으니 틀린 것 같다. 결국 포기하기로 맘먹고 그 자리에 멈춰 전화도 하지 않은 채 회수 차량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어느 대회에서나 밤이 되면 주변 경관을 제대로 살필 수 없으니 계절적인 변화에 대한 느낌 빼고는 풍경에 대한 느낌은 그리 크지 않을 수 있는데, 청정지역에서만 볼 수 있다는 수많은 반딧불의 향연, 무등산을 끼고 도는 긴 고개 고개 마다에서 느껴지는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맑은 기운, 차량 통행도 거의 없는 길가의 논에서 울어대는 개구리 울음소리, 여기가 낙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산 중턱을 뚫고 지나가는 괴물처럼 솟아 있는 도로도 없고 굽이굽이 가로등도 없는 캄캄한 그렇지만 아늑하고 아담한 도로만 있을 뿐이다.

53km나 될까한 지점에서 회수차량을 타고 골인지점에 돌아왔다. 그리고 새벽 5시 30분경에 낙오자들끼리 목욕탕에 들어가 샤워를 하는데 표정이나 걸음걸이들이 비교적 멀쩡하니 기분이 묘해진다. 쉴 자리도 없지만 서서히 골인하고 들어올 사람들을 대하기가 민망해진다. 서둘러 목욕탕을 나와 대회장으로 갔는데, 여기서도 염치없기는 마찬가지다. 12시까지 기다렸다가 대절버스를 타고 오기가 고역이다. 결국 광주 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도망치듯 올라와 버렸다.

나만의 과민 반응인지 모르지만, 어떤 핑계가 있었을망정 중도 포기했다는 것은 꽤나 창피스럽게 느껴진다. 마라톤 시작한 이후로 작년 오산종주 때 우이암에서 내려오다가 방학동 쪽으로 2~3km을 알바하고 우이동에 내려왔더니, 포기하고 기다리던 동료들이 포기하라고 꼬드겨 한번 포기한 것 하고 이번이 두 번째다. 습관 될까봐 완주는 해야지 했는데 결국 실패했다.

서울에서 차타고 내려갈 때부터 배가 살짝 아프긴 했었는데, 계속 찬 걸 먹은 탓인지 사흘째인 화요일까지 배가 아파 오늘은 병원엘 갔다. 사흘 분 약을 먹어보고도 차도가 없으면 위 내시경을 해보라는데, 속이 좀 매슥거리는 게 영 꺼림칙하다.

10km마다 풍부한 지원, 한적하고 쾌적한 길, 많은 자원봉사자님들, 여러모로 인상적이었습니다. 못 다 뛴 거리 내년에 채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