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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나를 찾아서

안동 휴가지에서의 7월의 마지막 밤

안동 휴가지에서의 7월의 마지막 밤(2009-07-31).

  그동안 달리기를 하면서 나름대로 꼭 지키고자 하는 규칙 같은 게 하나 생겼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마라톤 모임 정기 연습에 빠지지 않고 참가해 달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뛸 수 없는 경우가 많이 생긴다. 또한 달린다는 것이 결코 쉽거나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것만은 아니기에 때론 힘들고 귀찮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따라서 한두 번 빠지다보면 계속 빠지게 되는 걸 경계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변화무쌍한 세상살이 속에서 시계추처럼 계획표대로 완벽하게 살아갈 순 없다.

  그렇지만 월별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의지만 강하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렇게 월별 목표라도 세워두고 끝까지 그걸 채우기 위해서라도 뛴다면, 게으름이나 상황에 대한 이유나 변명이 용납되지 않은 내 자신의 의지와의 싸움에 대한 배수진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몇 달 전부터 월별 목표 거리를 세우고 채우려다 보니 결국은 마지막 주 며칠을 남겨 놓고 몰아치기를 하는 달이 많아졌다. 하지만 몸이 좀 혹사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려면 절대 물러설 수 없는 보루로 생각하고 싶었다.

  또한 몇 달 전부터 목표 수치로 정한 이 200㎞는 정모에만 참석해가지고는 채울 수 없는 거리다. 약간의 개인 훈련을 좀 더 해야만 된다. 그런데 하다 보니 이 200㎞라는 거리는 조금만 부지런해지면 비록 술을 마시고 뛰는 경우가 있다 할지라도 일상적인 일을 다 하면서도 충분히 채울 수 있는 거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당분간은 매월 200㎞를 채우는 것을 내 마라톤의 최고 중요한 요소로 두기로 했다.

  우리 가족은 이번 여름휴가 기간에 영주와 안동 지역의 유교 문화 테마 여행을 하기로 하였다. 그런대 여행에 앞서 지금까지 뛴 이 번 달 총거리는 176㎞, 24㎞의 거리를 못 채우고 떠나는 여행이기에 운동복과 운동화도 함께 챙겨 30일 풍기에 도착했다. 오후에 늦게 출발한 탓에 경북 풍기에 도착하여 숙소를 정하고 저녁을 먹고 나니 밤 10시가 가까워졌다. 팽팽한 배가 꺼지기도 전에 운동복과 운동화를 신고 풍기 읍내의 이름 모를 천변으로 뛰러 나갔다. 걷는 둥 뛰는 둥 하면서 집사람과 아이문제로 언쟁을 하다 보니 기분이 상해서 3~4㎞ 걷다 뛰다 들어오고 말았다.

 
7월의 마지막 날 31일. 풍기에서 먼저 소수서원을 둘러보았다. 3000원의 입장료가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어 들어갈까 말까 망설였다. 항상 관광지들에서 느끼는 생각 중에, 어디서나 박제화 된 똑같은 그렇고 그런 요즘 새로 지어진 텅 빈 한옥 건물들을 보면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번 여행의 목적이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기에 들어가 보기로 하였다. 입구에 솟아있는 수십 그루의 소나무들, 이것이 눈에 좀 띄지만 이런 정도는 우리 집 근처의 서오릉이나 서삼릉에서도 많이 보았던 것이다. 새로 지어놓은 그렇고 그런 서원 건물들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니 포스트 모던하다고도 보기 힘든, 시전거리라는 몇 채의 음식점, 가게, 그리고 그 안쪽으로 열 댓 채의 선비촌 이라는 게 있었다. 영주 지역의 유명 고택들을 모사해서 지어놓았다는데 몇 몇 채는 작은 방 하나에 7만원 정도의 비용으로 민박도 가능하단다. 옆에 자그마한 박물관을 들러서 나왔다. 3천원이 좀 아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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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코스로는 부석사를 들렀다가 안동으로 넘어가 도산서원을 갔다. 모든 서원 건물들이 안동댐이 만들어지면서 수몰되어 버릴 위기에 몰린 것을 물길이 미치지 않은 높은 지역으로 옮긴 것이란다. 여기도 근래 옮겨서 새로 지은 건물들, 특히 시멘트로 지은 한옥형 건물들을 보면서 무슨 의미를 찾아야 되는가 싶다. 유교든 불교든 이런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것은 정신세계의 문제를 좀 더 표현하고 보여주려 해야 할 텐데, 물론 이런 정신세계를 보여준다는 것은 쉽지도 않고 물신풍조에 젖어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도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별 의미도 없는 건물들을 보면서 마음이 허전한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앞뜰에 수령이 삼사백년은 된다는 물속에서도 자란다는 왕버들 나무가 그나마 볼거리라면 볼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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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산서원을 나와 병산서원을 들렀다. 세 서원을 둘러보면서 박제화 된 건물들을 보면서는 별 감흥을 못 받았고, 유교의 별다른 느낌도 못 받았다. 단지 세 서원 모두가 산 속 인적 드문 곳에 하천을 끼고 있어 먹고 살만한 한량들의 좋게 말하면 풍류일지 몰라도 사치스런 귀족놀음의 면모만 느껴졌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하회마을을 들렀다. 내가 본 안내지도의 느낌으로는 휘돌아가는 하천과 마을의 느낌이 난자 안으로 정자가 빨려들어 가는듯한 기묘한 형상인데 이래서 명당자리란다. 여러 채의 기와집과 초가집으로 이루어진 마을의 풍경은 몇 백 년 된 한국의 시골마을의 모습치곤 너무 세련되고 부유해 보였다. 아주 잘 나가는 양반 동네였기 때문에 나름대로 멋과 품위와 부귀까지 갖추어진 모습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자랑하기에 안성맞춤으로 보였다. 모든 나라나 사람의 인지상정은 못살고 못난 모습보다는 잘살고 잘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을 테니 말이다.

  그래도 하회마을에서는 기분 좋게 와 닿는 느낌이 있었다. 길게는 몇 백 년까지 된 고택들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물론 빈집도 여러 채 눈에 띄었다.) 돈 받고 하는 민박이라도 있어서 그나마 박제화 된 느낌이 덜했다. 민박이라도 치면서 건물이 사람의 손결을 타고, 수명 연장은 물론 박제화 된 느낌을 피하는데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좀 불편하더라도 여기서 하룻밤 민박을 할까 하고 물어보았더니 좁은 방 하나에 5만원에서 큰 것은 20만원까지의 좀 비싼 편이었다.

  오래 전에 TV에서 보았던 서구의 어떤 고도를 보면 오래된 건물들을 관광자원으로 보호하기 위해 정부의 까다로운 규제가 있기 때문에 실외는 물론 실내까지도 약간의 보수라도 하려면 정부의 까다로운 허가를 필요로 했다. 그런데 하회마을에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민박 간판이 현대식 아크릴 간판이라 너무나 이질적으로 튀어 보였다.

  휘돌아 흐르는 강물을 보노라니 부자들 한가한 뱃놀이가 그려진다. 내가 너무 프롤레타리아적 사고만 하는 것인가?

  안동 읍내로 나와 숙소를 정하고 안동찜닭으로 저녁 식사를 하였다. 예전에 안동찜닭이 유행하던 때 먹어보았던 맛보단 좀 더 나은 것 같다. 아니 어쩌면 허기가 맛을 돋웠는지도 모르겠다. 반찬은 백년초로 빨갛게 물들인 단무지 한 가지만 덜렁 나오는데, 바로 이런 게 가장 자본주의적인 그리고 한국적인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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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시 쯤 식사를 끝내고 숙소에 들어와 배가 꺼지기를 기다렸다. 내일이면 7월이 아니다. 이 밤 안에 목표를 채워야 한다. 정각 12시에 숙소를 나서서 뛰기 시작했다. 시간상으로야 벌써 8월 1일이지만 잠자리에 들기 전이니 7월이라고 우기고 싶다. 밖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물어 강변으로 갔다. 안동 시내를 지나는 낙동강 상류라고 하는 낮에 보았던 안동댐 근처에서부터 시내 아래쪽까지의 거리는, 사람들 말로는 7㎞는 될 것이라 하는데, 뛰어 보니 5㎞ 정도 밖에 안 되는 거리였다. 이 거리를 왕복 2회전을 하고 숙소까지 1㎞ 정도의 거리를 왕복했으니 총 22㎞는 뛴 샘이다. 시간상으로는 2시간 10분 걸렸다. 12시가 넘으니 강변 조깅거리에 불도 꺼지고 어두컴컴했다. 온 신경을 땅바닥에 모으고 뛰다보니 오히려 지루함이 덜한 것 같아 좋았다. 강변이다 보니 불어오는 시원한 강바람으로 인해 기분도 상쾌하고 컨디션도 좋게 느껴졌다. 울퉁불퉁한 보도블록을 피해 물가에 만든 50㎝ 정도의 제방 시멘트 길로 달리노라니 뻗은 풀들이 정강이에 스쳤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물컹한 풀이 정강이를 스치자 뱀이라도 걷어 찬 것 마냥 소름이 돋으며 겁이 덜컥 났다. 어쩌면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된다는 것이 오히려 이런 사소한 것에 놀라게 되는 역설도 생기나 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노면이 고르지 않은 보도블록이 깔린 쪽으로 옮겨서 뛰었다.

  그 동안 2000㎞ 이상은 뛰었을 신발 때문인지 요사이 뛰면서 무릎이 약간 부담이 된다고 느꼈다. 어제 오늘은 새로 산 신발을 신고 뛰었다. 그래서인지 매끄럽지도 않은 보도블록 위를 뛰는데도 무릎에 큰 이상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 그래서, ‘신발이 겉은 멀쩡해도 오래 신으면 안 된다.’는 말이 실감났다. 결국 시간은 넘겼지만 어제 3㎞, 오늘 22㎞를 합해서 7월 목표 200㎞를 채웠다고, 나 자신에게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