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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노동 일기

바보 천치 이야기

바보 천치 이야기.

  인테리어는 날씨가 아주 추운 12월,1월은 일이 좀 뜸하단다. 우리 사무실도 12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일이 뚝 끊겨버렸다. 그래서 한 이틀 일 없이 눈치 보면서 어슬렁거리고 있자니 여간 고역이 아니다.
  나의 원래 계획은 1월 7일까지 두 달을 채우고 그만 두고서 구정 전 한 달은, 예전 인쇄일 할 때 대량으로 제작해 처리하지 못하고 남아있는 세뱃돈 봉투(명칭이나 상품 쓰임새 등의 특징상 기존 우리나라에 존재해왔던 일반 상품이 아닌 내가 구상하고 만든 상품이기 때문에 인수자도 없었음)를 팔 계획이었다. 그래서 첫 면접 때 두어 달 만 있을 거라고 분명히 얘기했었고, 사장님도 1~2개월만 나와도 된다고 답 했었다. 그런데 몇 일 일이 없어 빈둥대다보니 갑자기 생각이 복잡해졌다.

 
사장님은 1년 전 쯤에 남편이 바람나 집을 나가는 바람에 함께 하던 사업을 여자 혼자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기죽지 않고 아침부터 밤늦도록 동분서주하며 아주 꼼꼼하고 깔끔하게 일 처리를 하면서, 두 자매를 키워나가는 모습이 꽤나 안쓰러울 때가 있었다. 그래서 바쁘게 일 할 때는 귀찮거나 힘든 내색 안하고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고자 노력했었다. 그런데 한가해지니 조만간에 그만 두어야 하는 것에 대해 미안한 생각이 점점 더 크게 들었다. 대부분의 고용주들은 정해진 일을 위한 한시적인 임시직이거나 정말 맘에 들지 않는 경우가 아니라면 직원이 오래 있기를 바랄 것이다. 그래야 숙련도가 높아지고 업무 효율 또한 높아질 테니 말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오래 있지 않을 거란 얘기는 했지만 일도 없이 날짜만 채우는 게 더욱 미안하고 서로에게 의미 없는 시간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12월 17일 날 전격적으로 그만 두어야겠다는 얘기를 드리고 그날부로 그만 두었다. 사장님도 놀리면서 월급 준다는 게 아까웠던지, 기다렸던 것처럼 “맞아요. 일 없이 노는 것도 고역 이예요.” 하신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미안했던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그래도 미안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월급날 이후로 열흘 더 출근한 급료는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고 퇴근해서 각시한테 그만두었다고 하자, 열흘 치 급료는 어떻게 됐느냐고 묻는다. 그래서 “그냥 놔두라.”고 했다 하니까, 나더러 “바보 아냐? 아니 천치 아냐?” 그런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한심스러워 할 말이 없다. 오랜 세월 직원들을 고용하고 있으면서 비수기 때는 2~3개월 씩 거의 일 없이 놀리면서도 월급을 깎거나 안 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일이 없다 해도 출근해서 시간을 보내며 대기라도 하고 있었는데, 당연한 내 권리도 못 챙기고, 오히려 먼저 권리를 포기하는 바보 같은 짓이란! 이건 그야말로 자선도 아니고, 못난 짓일 뿐인데도, 못난 짓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우습고 이해가 안 간다.

  예전에 나의 아버지가 꼭 이랬던 것 같다. 별다른 이해관계도 없고 미래적 투자가치도 거의 없어 보이는, 그야말로 지나가는 사람도 붙잡아 밥 사고 술 사고 하셨다. 이해를 따지며 얍삽빠르게 행동도 못 하셨지만, 남한테 받아야 할 당연한 권리나 비용은 강력하게 요구를 못하고 손해보곤 하셨다. 그런데 나는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빼 닮은 것 같다. 따라서 나 자신한테는 그런대로 강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남한테는 너무 유하고 싫은 소리 한마디도 제대로 하질 못하니, 이걸 이용하는 사람들도 꽤 많이 만났다. 서로 속이 훤히 보일만큼 뻔한 수작을 벌이면서도, 차마 낯 뜨거워 말 못하는 나의 성격을 이용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좋은 재주들을 갖고 있으면서도 왜 돈을 못 버느냐고 말한다. ‘재주 많은 사람 밥 굶는다.’는 말도 있지만, 나는 여기에 더해 악착같은 금전욕이나 짠돌이 근성 같은 건 너무 약하면서도, 술 사기 좋아하는 ‘어설픈 인간애’와 ‘헤픈 생활 습관’이 있다. 계속 재발하는 무좀같이 반복되는 못난 습관을 대패로라도 깎아낼 수 있다면 깎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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