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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나를 찾아서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세상-유성온천울트라

2010-05-15. 유성온천울트라마라톤(100km).  기록 : 13:49:09.

  항상 습관적 타성을 경계하며 수시로 나 자신을 점검 비판하는 경계의 각을 놓지 않고 살아가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시간 혼자 사색하고 뭔가를 또 준비하며 외로움조차도 즐기고 싶은 마음이 많다. 그런데도 정말 외로워서 안 되고, 불편해서 안 되고, 술 좋아해서 안 되고, 사람이 어중간해서 안 되고...... 이래저래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세상,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인가보다.

  이번 유성온천울트라는 아는 이 한사람 없는 대회를 외톨이로 출전하다보니, 울트라마라톤 단체에 가입해 동무라도 사귀어 외롭지 않게 달려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내 성격이 단체 가입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다가 비록 울트라마라톤 전문 클럽은 아니지만, 화정마라톤클럽에서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단체 가입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 대회에서는 나 혼자 고독을 즐기며, 미래에 대한 설계와 그간의 마라톤을 뒤돌아보고 앞으로의 계획도 새로이 새워보고 싶었다. 평소 마라톤 대회에서야 클럽 멤버들과 함께 재미있게 즐기며 뛰었으니, 참가 인원도 그리 많지 않고 어둡고 한적한 밤길을 달리는 이번 대회에서야 고독을 만끽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후 6시에 출발하여 7~8km를 달리고는 고독을 빼앗겨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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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km 지점에서 이번 대회에 참가하신 시각장애인이신 이용술님을 만났다. 이용술님을 보노라니, 7~8년 전에 보았던 그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용술님께 말을 걸어보니 내 기억이 맞았다. 내 사무실은 충무로에 있었는데, 한 식당을 지정해놓고 밥을 먹으며 주인 아줌마와 아주 친하게 지냈었다. 그 아줌마의 동생이 마라톤을 했었는데, 소속 마라톤 클럽 멤버들이 가끔 이 식당에서 뒷풀이를 하곤 했었다. 임춘애씨가 그 클럽의 코치를 하고 있어서 그 식당에서 몇 번 봤는데, 30대 중반이 넘었을 텐데도 가냘픈 소녀 같은 모습에 항상 못 마시는 술을 마신 사람마냥 발그레한 얼굴이었다. 그 자리에서 같은 멤버인 이용술님도 스쳐보았는데, 좀 더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그 식당 동생이 이용술님 가이드하는 사진이 들어있는 신문기사를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두었었다. 그러면서 부연해 들은 얘기가 이용술님이 아주 유명한 분이며, 사하라 사막 횡단 마라톤인가를 준비한다는 얘기도 들었었다. 그래서 이용술님께 그때 상황을 애기해보니 내 기억이 맞았다.

  그 당시 내가 마라톤 뒷풀이를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모두들 나 같은 사람들과는 많이 다른 ‘괴물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너무너무 부러웠었다. 그때나 달리기를 하고 있는 지금이나, 달리기를 나 자신의 건강과는 크게 연관시켜 생각하질 않는다. 내 스스로 많이 비만하다거나 건강에 크게 이상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언젠가는 풀코스를 달려보고 싶다는 염원이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도전 정신도 약해지고 게을러지는 자신을 채찍하고, 희노애락 사연 많은 인생길과도 같은 압축된 파노라마를 만끽해보고 싶었었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용기를 내지 못했던 이유는 초중고 시절 지독히도 못했던 달리기와 체육에 대한 열등감이 세상사람 다 해도 나는 안 될 거라는 커다란 부정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호수공원 한 바퀴를 걷는 속도로 뛰어보고, 이렇게 거북이처럼이라도 노력하다보면 언젠가는 풀코스도 6~7시간 안에는 완주하지 않겠는가 하고, 마라톤클럽에 가입했었다. 그리고 딱 1년 8개월이 지난 오늘 이 순간엔 7~8년 전에 보았던 괴물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당당한 괴물이 되어 두 번째 울트라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 자신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대견한가? 이용술님께 한참을 자랑했다. 마라톤 시작 6개월 만에 3:52분에 들어온 거며, 1년도 되기 전에 오산종주며, 100km울트라까지 완주한 걸 말이다. 마라톤 경력 17년에 풀코스 160회, 100km울트라 33회의 경력을 갖고 계신 이용술님이 반가움과 함께 대단하다고 칭찬을 해주신다. 이러한 인연이 너무 반갑고 의미 있어, 오늘밤의 고독을 포기하고 이용술님 일행을 따라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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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술님을 따라 뛰면서 사랑의 끈을 번갈아 팔뚝에 끼고 패매하시는 권영호님, 노희두님과도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이분들이 시각장애인들의 마라톤을 돕기 위한 모임인 ‘happy leg'라는 모임의 멤버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빠른 속도로 달리는 이용술님도 대단하시지만, 이용술님이 돌부리에 부딪쳤을 때 노희두님의 순발력 있는 대응이나 노면상태 등을 세심하게 신경쓰며 인도하는 권영호님의 배려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오르막길도 지치지 않고 부드럽게 치고 올라가는 모습들을 보노라니 탄탄한 마라톤 실력과 깊은 내공들이 느껴진다. 혼자 달리기도 힘든 길을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고 누군가를 끝까지 책임져야하는 한다는 게 무척 힘들 것 같다. 그러기에 그들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져서 나도 1시간짜리 10km코스라도 패매를 할 수 있느냐고 물으니 가능하단다. 그래서 ’happy leg'에 가입하기로 약속했는데, 능력이 허락된다면 꼭 같이해보고 싶다. 무슨 일이든 영원히 변치 않고 그 마음 그 상태를 꾸준히 유지하기는 힘들 것이다. 따라서 언젠가는 달리기가 싫어지거나 게을러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달리기에서 나를 필요로 하고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다면 지속시켜야하는 커다란 이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누군가에게도 도움이면서 자신에게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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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직은 경력과 경험이 짧아서인지 아니면 진짜로 체질이 예민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준비를 소홀히 하면 굉장히 힘들고 후유증도 크다. 대회를 치르고 나면 속이 메스껍고 토하기도 일쑤다. 그런데 저번 4월 25일 MBC한강마라톤 대회 이후로 연습도 별로 하지 않고, 술도 많이 마시며 몸 관리도 별로 하질 않았다. 그래서인지 부드럽게 나아가는 쟁쟁한 실력의 세분을 따라가는 게 힘이 좀 부쳤다. 그렇지만 너무 빨리 처져버리면 오늘 대회가 더 힘들어질 것 같아 따라갈 수 있을 때까지는 따라가 보기로 했다. 4시경에 간단하지만 국밥을 먹었는데 20km도 가기 전에 굉장히 허기지다. 22.7km에서 떡을 많이 챙겨먹고 나니 살 것 같다. 또 세분을 따라 뛰었다. 36km 급수지점에 이르니, 지대도 높고 깊은 산속인데다가 땀을 많이 흘린 탓에 많이 추워진다. 남들 다 옷을 꺼내 껴입는데,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질 않았었다. 노희두님이 1000원짜리 1회용 우의를 빌려주어서 입으니 살만하다. 아마 이 우의가 없었더라면 너무 추워서 대회를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중간 식사를 하는 45km 지점에 도착했다. 나는 벌써 땀도 많이 흘리고 탈수 증세 때문인지 밥맛이 없다. 이용술님이 후반은 밥심으로 뛰는 거라며 싫어도 먹어두라고 해서 억지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바로 출발해 뛰는데 배가 아프고 속이 매슥거려 꼭 토할 것 같다. 결국 50km 지점에서 세분께 먼저 가시라 하고 나는 멈춰서고 말았다. 그리고는 버스정류장의 좁은 벤취에 누워 속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10분이라도 잤으면 좋겠다 싶은데 춥고 시끄러워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10여분을 누워 있다가 다시 일어나서 뛰어본다. 그러나 여전이 배가 아프고 속도 매스껍고 한번 꺾인 의지를 돌이키기 힘들다. 다시 버스정류장 벤치에 누워 곰곰이 생각했다. 춥고 컨디션도 안 좋으니 여기서 포기해야 되는가? 그러나 이 정도의 고통으로 쉽게 포기해버린다면 앞으로 너무 나약한 습관이 될 것 같아 비록 16시간이 걸리더라도 완주는 하리라고 맘먹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달리다보니, 아픈 것도 가라앉으며 심적 여유와 함께 힘이 솟았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나름대로 리듬을 탄다는 기분으로 뛰다 걷다를 반복하며 비교적 속도감 있게 나아갔다. 한참을 달리는데, 세 사람이 짝이 되어 달리던 분들 중에 한분이 말을 건다. “아까 버스정류장에 누워 있어서 포기할 줄 알았더니 빨리 따라왔다.”고...... 내가 비닐 우의를 입고 누워 있으니 눈에 띄었던 것이다. 배가 아파서 누워있었다고 했더니, 자신의 배를 만져보란다. 뱃속에 손을 넣어보니 배가 따뜻했다. 이유는 셔츠 안쪽에 수건을 두 겹으로 두툼하게 대어놔서 보온이 되기 때문이었다. 속이 차가워 위가 오므라들어 꼬이니 배가 아프고 소화가 안 돼 매슥거린다는 거였다. 나한테는 정말 유용한 정보다 싶어 꼭 실행에 옮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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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거리를 짧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이름 모를 산 고갯길을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76km지점에서 컵라면을 먹고, 그야말로 99재는 될 법한 구불구불 고갯길 ‘마티재’를 오르노라니 완연히 동이 트면서 플래쉬가 필요 없게 되었다. 80km 지점인 마티재 정상을 지나 내리막이다. 이제 나의 목표는 최대한 빨리 도착해서 오늘 이용술님 일행을 한 번 더 보는 것이다. 잘하면 목욕탕쯤에서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참을 신나게 뛰어 마티재가 끝나는 82km 지점에 왔을 때, 앞에 이용술님 일행이 쉬고 있었다. 너무 반가워 소리지르며 달려가니 이용술님이 일어나 하이파이브를 해주시고, 권영호님과 노희두님도 생각보다 빨리 왔다고 추켜세워 주신다. 그렇게 반가운 재회를 하여, 아이스크림이 기다리는 91km 지점까지 함께 달렸다. 세분을 만나고 나니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최근 마라톤 풀코스에서 연거푸 3번을 기록 도전에 실패해 기가 꺾여 있었는데, 오늘 울트라에서라도 작년보다 1분이라도 기록을 단축하면 의미가 되고 용기가 되살아 날 것 같았다. 그래서 세분께 양해를 구하고 나의 기록을 세우기 위해 마지막 9km를 열심히 달렸다. 마지막 유성천 1km 정도의 직선주로에 들어섰을 때는 최선을 다하면 작년 기록보다 10분은 단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밤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렸던, 배에 수건을 대라고 알려주었던 세분이 앞서 달리고 있었다. 이분들은 기량이나 경력에서 나보다는 한참 위다 싶었지만 마지막 스퍼트를 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분들을 몇 백m 남겨두고 추월해 가기가 미안해 뒤따라 가다가, 조금만 빨리 뛰어줄 수 없느냐고 했더니, 먼저 가란다. 그렇게 13시간 49분으로 작년보다 8분을 단축한 기록으로 골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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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인하고 몇 분이 지나자, 우리 클럽의 형님이 안부 전화를 하셨는데, 목이 메여 전화 받기가 힘들다. 한밤중에 떨면서 포기를 고민하다가 괜찮은 기록으로 골인하고 나니 감격이 복 받혔던 것 같다. 조금 지나자 이용술님 일행이 골인을 하기에, 밥과 막걸리를 챙겨다 드리고, ‘happy leg' 가입을 다시 한 번 약속하고 서둘러 헤어졌다. 오늘 13시부터 내가 속한 화정마라톤클럽의 1년 중 가장 큰 잔치가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주최 측 봉사자 분들의 밝고 친절한 얼굴들은 달리는 걸음을 한결 가볍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출발 전 사회자분의 말씀처럼 “세상은 괴짜들이 변화 발전시킨다.”는걸 굳게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