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마라톤 멘토.
몇 년 전에 잠시 놀이 삼아 기원을 다닐 때 여러 사람이 바둑을 가르쳐 준다고 했었다. 그런데 나는 “이 나이에 바둑 배워서 어디 써먹겠느냐?”하면서 바둑 공부를 하지 않았었다. 그랬던 사람이 그로부터도 몇 년이 더 지난 지금에 와서는 중학생의 심정으로 공부하는 게 생겼다. 밤낮 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책까지 사서 읽으며 공부하고 있다. ‘마라톤’ 이것이야말로 지금부터 해도 늦지 않았고, 앞으로 뛸 수 있는 날까지 오랫동안 함께 갈 친구로 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사실 몇 년 전부터 마라톤을 꼭 하고는 싶었지만, 게으름보다도 너무 자신이 없었다. 과거 지독히도 달리기를 못했다는 기억이며, 폐결핵으로 인한 숨 가쁜 것 때문에, 세상 사람들 모두가 마라톤을 한다 해도 나만은 못 할 것 같았다. 따라서 수 년 동안 동경해 왔지만 직접 해볼 엄두는 내지 못했었다. 아마 이 분을 못 만났다면 어쩌면 영원히 마라톤과 인연을 맺지 못했거나 훨씬 늦어졌을 것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인쇄 계통에서 아는 사람 중에 금박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를 “목숨을 걸고 일을 하는, 돈 벌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에게나 남들에게 칭찬했었다. 이 사람은 할 일을 쌓아두고도, 자기한테 오는 일을 마다하는 경우가 없다. 몇날 며칠이고 공장에서 야전침대를 깔고 잠깐씩 눈을 붙이며 일을 해댄다. 물론 일이 거칠긴 해도 빨리빨리 좀 싸게 해주는 식의, 우리나라 사람들의 습성에 가장 맞는 영업방법이라서 그런지 돈을 잘 벌었다. 그리고 몇 년 전에는 2층짜리 건물을 사서 이사했다. 그리고는 이 사람이 표가 나게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일을 가져다주고 돈을 주는 거래처들을 자기 입맛대로 길을 들이려 하질 않나, 말을 함부로 하질 않나, 안하무인격으로 변해갔다. 이 사람이 자주하는 말 중에 “나는 금박 선배가 없다.”였다. 진짜 금박 일을 오래한 직간접의 선배들 앞에서도 이런 말을 함부로 해대는 오만방자함이 있었다.
남 얘기를, 그것도 험담을 이렇게 길게 늘어놓은 이유는, 이 얘기가 남 얘기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얘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컴퓨터 영업에서 컴퓨터 응용 쪽으로 방향을 옮겨가다가, 인쇄물 공급의 비중이 커지면서 인쇄에 점점 깊이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인쇄만을 생각하고 시작한 사업도 아니고, 인쇄는 단지 부수적이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별다른 준비가 없었다. 인쇄문제가 당장 발등에 떨어진 과제가 되어서야 충무로 인쇄골목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인쇄 기본도 모르는 사람의 막연한 질문을 누가 제대로 답변이나 해줄 것이며, 거래 성사여부도 불투명한 것에 시간 들여가며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다. 결국 수천만원 씩의 속 쓰린 수업료를 수시로 들여가며 홀로 터득하였다. 단 하루라도 남 밑에 있었거나 여유 있게 물어볼 사람도 없었기에,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식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충무로에서 내 물건을 만들어 밖으로 파는, 충무로 거래처들에는 일을 주고 돈을 주는 입장이었다. 그러니 겉으로야 아무리 겸손한척했다 치더라도 속마음까지 겸손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래서 사람들이 야속하고 약 오를 때면 속으로라도 “충무로에 내 선배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하는 말이 튀어올 정도였다. 인쇄라면 누구에게도 지기 싫고, 도움 받을 것도 없다고 생각할 만큼 오만함에 빠져있었다. 어쩌면 이것은 홀로 부딪쳐 온 세월에 대한 보상심리도 있었던 것 같다. 하여튼 이런 오만함이 사람들과의 만남에서도 비타협적이고 배타적인 행동으로도 나타나곤 했었다.
그러한 충무로 인쇄 계통에서 만난분 중에 지금은 감히 ‘마라톤 스승’이라고 불러드려야 할 이 분을 만난 건 5~6년 전이다. 이 분이 내 사무실이 있는 같은 건물로 이사를 오시면서 만남이 시작되었다. 이 분과 친해지기 전의 초반 인상은 그리 썩 긍정적이지는 못했었다. 서울 부잣집에서 엘리트 코스만을 밟아온 듯한 전형적이 ‘서울 샌님’ ‘서울깍쟁이’ 같은 도도함이 느껴졌다. 그런데 당시 나의 오만하고 비뚤어진 심보가 인쇄라면 누구 도움을 받거나 꿀릴 게 없다는 생각이었으니, 이 분이 마라톤을 하는 분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친해지지 않았고, 이 분에 대한 편견도 그대로였을지도 모른다. 비록 마라톤을 한 번도 해본적은 없었지만, 그 짝사랑만은 꽤 깊었던 터라, 마라톤을 열심히 하시는 게 너무 부러웠다. 더군다나 나보다 13~4년 연상이신 분이기에, 나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현실감도 느껴졌다. 지금은 이분에 대한 인상이 초반과는 달리 대부분 바뀌었다. 상류층들과만 어울릴 듯한 도도함은 틀려도 너무 틀렸다. 어울리는 사람들 면면을 보면 그 폭이나 깊이가 대단하시다. 어찌 보면 서로 격이 좀 다를 것 같은 사람들과도 대단히 깊이 있는 교류를 하시는 것 같다. 판소리가 너른 마당에서 다수를 상대로 하기에 소리가 크고 과장이 좀 심한 편이라면, 이분 얘기는 사랑방에서 조용조용히 행해지는 ‘서울 판소리’를 듣는 것처럼 구수하면서도 부드럽다. 우리나라 산악계의 원로이자 ROTC 장교출신으로서, 현장감 넘치는 풍부한 경험과 다양한 관심은 몸에 밴 교과서적 습관과 어우러져, 이야기가 정확하고 표현들이 적절하여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로 빠져들게 만든다.
이렇듯 경험에 바탕을 둔 분의 훌륭한 말솜씨의 마라톤 설교를 오랫동안 들었던 것이다. 바둑이야 접한 자체가 마지못한 것이었고 부정적 심리가 컷지만, 마라톤은 긍정과 동경 필요성을 절감했기에 한마디 한마디를 생생하게 기억할 정도로 내 것이 되었다. 내가 뛰는 자세가 좋다는 말을 듣는 건 100% 구술 교육의 효과다. 어지간한 핸디캡은 극복하려 해야지 핑계대지 말라는 말씀은 나의 초반 의지력 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 마라톤을 시작한지 길지 않은 시간에 이렇듯 빨리 적응해 갈 수 있었던 것도 오랜 ‘정신적 동화의 덕’일 것이다.
마라톤 스승 이영균님께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이 든다. 나 또한 취미 정도로 하는 운동이지만 앞으로 누군가에게 마라톤을 제대로 전파하기 위해 실제와 이론을 겸비하도록 좀 더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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