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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나를 찾아서

한반도횡단 308Km 대회 6 - 이용술씨가 밝혀주는 빛

한반도횡단 308Km 대회 6 - 이용술씨가 밝혀주는 빛.

  고원 지대를 지나고 이어지는 오르막을 올라 드디어 마지막 봉우리인 대관령 정상에 올랐다. 이제는 내리막과 강릉 시내만 남아 있으니 거의 끝난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굽이굽이 끝이 없는 경사 심한 대관령 재를 내려가는 게 그토록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는 상상도 못했다.

  이제 터덜터덜 내려가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도저히 속도를 낼 수가 없다. 이전까지만 해도 내리막에서는 나의 빠른 걸음을 유감없이 발휘해 뛰는 사람 못지않은 속도를 보여왔었는데, 여기서는 느린 속도로 걷기도 힘들다. 모처럼만에 비가 그쳐 신발의 물기가 어느 정도 마르자 물집 잡힌 발바닥이 훨씬 더 따끔거린다. 차라리 물에 흥건히 젖어 있었을 때는 뛰면서 물집이 터지는 느낌이 들어도 온통 불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덜 따가웠었는데, 발과 신발이 조금 마르고 나니 힘이 가중되는 내리막에서느 유리파편 위를 걷듯이 따끔거려서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거기다 부상당한 왼쪽 장경비인대의 통증은 갈수록 심해지니 희망의 내리막이 아니라 그야말로 악몽의 대관령 99재다. 왼 다리가 너무 아파 길가의 나뭇가지를 주워 지팡이를 삼아보지만 익숙하지 않아선지 전혀 도움이 안 되고 거추장스럽기만 하다. 무릎과 발바닥 통증 때문에 급경사의 내리막에서 허리에 힘이 들어가니,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파온다. 가끔 가드레일을 잡고 스트레칭 한번씩 하고 계속 하산을 하는데도 안개 낀 산은 높이를 알 수 없고, 가도가도 평지가 나오질 않으니 정말 죽을 맛이다.

  대관령 고개 내리막이 거의 끝나간다 싶은 즈음에, 내 각시 다음으로 나의 성공을 기원해주는 소중한 친구가 차를 몰고 나를 응원하러왔다. 너무 반가워 목이 메고 얼싸안고 춤이라도 추고 싶다. 그러나 주최측에서 보면 괜한 오해라도 할까봐 차에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먼저 가 골인지점에서 기다리라 하고는 또 혼자 쓸쓸한 행진을 한다.
 
결국 11~12Km 나 될까한 굽이굽이 대관령 고개 내리막길을 3시간도 넘게 걸려서 내려왔다.

  17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골인지점 11Km 전인 남대천교 고가 밑을 통과하였다. 그러니 19시 전후쯤 해서 골인할 것 같다고, 꺼두었던 휴대폰을 켜고 경포대에서 기다리고 있는 각시한테 전화를 했다.

  그런데 보여지는 풍경상의 느낌이 계속 직진해야 맞을 것 같다는 생각에 강릉시청 방향으로 좌회전을 하지 않고 직진하다가 돌아와 다시 강릉 시청방향으로 기수를 돌리다보니 이번 대회에 참가한 시각장애인 이용술씨 일행을 만났다. 골인 지점 얼마 남지 않은 거리에서 나만 먼저 앞으로 달려 나가기가 미안해 멀찌감치 떨어져 뒤를 따랐다. 
  장명택님 권영호님이 양쪽에서 이끄는대로 나아가는 폼이 뒤에서 보니까, 마치 끌려가기 싫은 소 도살장 끌려가듯이 엉덩이를 쭉 빼고 겅중겅중 가는 게 너무 안타까워 목이 메어온다. 대관령 고개를 내려올 때는 발바닥이 너무 따끔거려 단 몇mm의 작은 돌맹이도 피하며 발을 옮겼는데, 바닥을 볼 수 없는 이용술씨 입장에서는 발바닥에 힘이 실리지 않게 하기위해 저렇게 엉거주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토록 처절한 몸부림을 쳐야 하는가? 그런데 이용술씨가 이토록 몸을 살라 밝히는 불빛의 수혜자들은 많을 것이다. 나도 직접적인 수혜자 중의 한사람이다.

  7~8년 전 내 사무실의 구내식당처럼 이용하던 충무로의 식당에서 이용술씨가 속한 마라톤 팀이 뒤풀이 하는걸 여러 번 바라보며, 정말 자신은 없지만 저렇게 시각장애인도 뛰는데, 멀쩡한 내가 정신 건강과 극기를 위해 도전하지 못한다면 지나친 게으름이고 나 자신에 대한 무책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딱 2년 전 9월 17일 쌩초자의 마라톤이 시작돼 돌고 돌아 올 5월 15일 유성울트라에서 이용술씨를 다시 만나, 서로 동갑이라는 걸 알고 친구하기로 했다. 그런 인연으로 이번 이용술씨의 횡단을 가능케 한 ‘해피레그’에도 회원으로 가입했었다.

  나는 이번 횡단마라톤을 마라톤 시작 2주년을 위한 자축의 기회로 삼고 싶었다.  그러나 짧은 경력이나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능력 때문에 완주를 한다는 건 전혀 확신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아직은 해피레그 회원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은 부분 조심스럽기도 한데다가 괜히 이용술씨 주변에서 얼쩡거리다가 중도에 포기해버리면 이용술씨의 심리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 같아, 이번만은 전혀 남남처럼 행동하기로 마음 먹었었다.

  나는 그동안 김용열 매니저님을 중심으로 ‘해피레그’ 전 회원이 얼마나 많은 준비와 노력을 해왔는지를 직간접적으로 보아왔다. 그러기에 조금이라도 도움은 못 될망정 악영향을 끼칠까봐 정말 조심스러웠다. 결과적으로 내가 끝까지 완주하는 바람에 새까만 후배에게 지기 싫어서라도 이용술씨가 이를 악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코가 벌렁거려진다.

  이번 대회 최고의 주인공 이용술님, 연출자 김용열님, 헌신적인 길 안내를 맡았던 임정규님, 장명택님, 권영호님, 오인수님, 김순임님, 그리고 물심양면의 노력을 아끼지 않은 강미애 총무님과 전 회원님들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축하드립니다. 당신들은 인내와 끈기와 배려와 조화의 멋을 보여주신 희망의 승리자들이십니다.

  한참을 가다가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홀로 떨어져 외톨이가 되고 말았다. 쭉 직진하면 되는 그다지 복잡한 길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도무지 방향을 잡을 수 없고 어두워진 저녁 길 외곽이라서인지 마땅히 물어 볼 사람도 눈에 띄질 않는다. 갈팡질팡 하면서 지나가는 차에게라도 물어보려 손을 들어도 멈춰주질 않고 지나가 버린다. 골인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안 나타나니 기다리던 각시는 계속 전화를 해대는데, 위치나 방향을 가늠할 수 없으니 답답하다. 강릉 시내에서 경포대 가는 길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후회가 되지만 소용이 없다. 결국 헤매고 헤매다가 예상 시간보다 1시간 이상 늦은 62시간 18분에 골인했다. 그리고 골인 후에 들었는데, 이용술씨도 1시간여를 헤매다가 나보다 조금 전에 골인했단다.

  2박 3일 동안 폭우 속에서 주최측 관계자 분들과 여러 봉사자님들이 무진 애를 써 주신데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차로 계속 왔다갔다하며 보호하고 응원하며, 각 CP마다 환한 얼굴로 맞아 줄 땐 피로회복제라도 마신 양 힘이 솟았다.

  그러나 강릉문제 만큼은 다음 대회를 위해서 한마디 드리고 싶다. 대회전 설명회 때, 강릉 마라톤 팀에서 같이 뛰어주는 자원봉사를 할거라 했는데 없었다. 다행이 시간 안에 들어갔으니 망정이지 끝까지 다 와서 헤매다가 시간을 초과해 버렸다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 아무리 서바이벌이라 해도, 또 대회의 격을 높이기 위해서 완주율을 좀 조절할 필요가 있다면, 대회 중간에 컷오프 시간이나 코스를 좀 더 어렵게 설계하더라도 마지막 강릉 구간은 안전하게 골인 할 수 있고, 또 대회가 더욱 풍성한 느낌이 들게 하기 위해서라도 좀 더 많은 길 안내 도우미들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중고생들 봉사활동 신청이라도 받아 중간중간 깃발을 들고 서 있게 할 수는 없을까?

 

  잠 안자고 달린 2박 3일의 대장정을 마치고 골인하면서 내 스스로 한층 성숙해지고 자신 있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사람들 앞에 자신 있게 나설 줄 아는 멋진 사나이가 못 되는, 사람들 앞에만 서면 얼굴 빨개지고 말을 못하는 음지형 인간이 내가, 자신 있게 주인공처럼 찍히기보단 남을 찍어주기 좋아하는 스텝 같은 내가,처음으로 당당하게 각시 손잡고 골인하고, 껴안아 주고, 뽀뽀하라고 해서 뽀뽀도 해주고 원 없이 찍히는 주인공이 되었다. 사람들 앞에서 나의 이런 적극적인 행동을, 각시는 18년을 살아오면서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황홀했을 것이고, 나의 횡단을 돕느라 들인 노력의 본전을 뽑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