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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노동 일기

사장님의 컴퓨터 선생이 되다.

  내가 출근하는 사무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장님의 손아래 동서가 또 인테리어 사무실을 하고 있는데, 항상 4~5개 이상의 현장을 동시에 작업할 정도로 일이 많다. 그러다보니 우리 사무실에 일이 없을 때는 그쪽 일을 도와주기도 한다. 그쪽 사무실의 사장님은 나보다 나이가 두세 살 어린 것 같은데, 항상 바쁘고 부지런하게 일을 한다. 사장이라고 잠시라도 뒷짐을 지고 있거나, 말로 일하려 하지 않고 사장인지 인부인지 모를 만큼 페인트와 먼지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고 배울 점이다 싶다. 이러한 사장이 내가 과거에 인쇄 일을 했다니까 컴퓨터를 잘하느냐고 묻더니 도면 그리고, 디자인을 할 수 있고, 사진 샘플들이며 견적서 같은 서식을 만들 수 있도록 컴퓨터를 가르쳐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가능하다고 했더니 바로 교육을 시작하자고 해서 일주일에 2회씩 벌써 몇 차례 수업을 하였다.

  사실 나는 컴퓨터에 대한 수준이 아주 높지는 못하지만 꾀나 폭넓게 컴퓨터를 다루었었다. 잠깐이나마 컴퓨터 영업부터 인쇄를 하기 위해 IBM과 MAC으로 그래픽 디자인은 물론 초보 단계 프로그래밍과 홈 페이지 제작도 직접 했었다. 그러다 보니 충무로에서 인쇄 일을 할 때는 컴퓨터에 대해서 막히면 나에게 문제의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인쇄는 컴퓨터로 인해 변화가 아주 심한 분야인데, 예전 같으면 일일이 활자며 사식이며 제판 카메라 등을 통해 사진 찍어서 오려 붙이고 하는, 열 사람이 해야 될 일을 요즘엔 컴퓨터 하나로 한 사람이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나도 컴맹 세대인데 나보다 나이를 더 먹은 사람들은 당연히 컴맹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이삼십년의 인쇄 경력이 무색케 되어버렸다. 컴퓨터를 모르고 그래픽의 기본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디 가서 떳떳하게 견적조차도 낼 수가 없다.

  그 긴 인쇄 경력에 인쇄물을 제작하고 단가 내는 거야 훤하지만, 많은 회사들을 견적 내러 들어가면 컴퓨터 앞으로 오라고 해서 외국에서 온 데이터를 쓸 수 있느냐고 물어 보고, 디카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쓸 만한 해상도가 되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런데 그래픽의 원리를 모르고 컴퓨터를 모르면 시원한 답변을 해줄 수 없다. 그러니 엉뚱한 얘기로 말이나 돌리고, 견적 내러 찾아가는 게 무서워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인테리어라는 것도 느낌이나 일의 형식에 있어서 조금은 앞서 가고 세련되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은가! 그런데 이 사장님은 거의 컴맹 수준이다. 그러다 보니 견적서조차도 수기로 적어주는 게 시간 낭비도 많을 뿐더러 창피하기도 하단다. 또 그래픽 디자인이나 도면 그리기 등을 좀 배우고 사진 자료들을 잘 정리하여 고객에게 보여주면 훨씬 효과적이고 사업이 한 단계 향상될 거라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사업이 워낙 바빠서 과연 공부할 시간이 있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워낙 의욕이 강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수업은 주로 낮에 힘든 일을 하고도 저녁 9시 넘어서부터 밤 12시 경까지 진행하고 있다. 첫날은 컴퓨터에 대한 전반적인 부분과 앞으로의 수업 방법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몇몇 질문들을 받는데 마우스 왼쪽, 오른쪽이나 키보드 등에 관한 아주 기본적인 질문을 하는데, 워낙 초보자이다 보니 어찌 보면 당연하면서도 막막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번에 컴퓨터 교육을 하면서 정한 방법은 예전의 실패들을 거울삼아, 처음에는 교재도 없이 오로지 손가락으로 공부한다는 기분으로 하루에 컴퓨터하고 씨름하는 시간을 서너 시간 이상 갖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두 번째 수업 시간에 보니 워낙 바빠서 해 보라고 한 숙제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컴퓨터를 별로 만져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성공에 대한 불안감과 함께 실망감이 밀려왔다. 거기다가 나이 먹은 사람들의 특징인 엉뚱한 얘기로 시간을 잡아먹는 경우도 꽤나 발생하다보니 조금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사오정 오륙도 나이를 지나서도 많은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며 살아가고 싶다. 따라서 남들도 나이 들어서도 컴퓨터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 그리고 저 사장님이 나에게 컴퓨터를 배워서 사업이 한 단계 향상된다면 그 또한 보람이지만, 컴퓨터 학습을 성공시켜주고 나면 몇몇 현장을, 첫 견적에서부터 계약은 물론 자재 구입과 일 진행은 물론 마무리까지 총체적으로 집중 레슨은 받는 걸로 멋진 거래를 요구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런 계획에 어둠이 깔리는 기분이다. 
 
그 다음날 바로 세 번째 수업이 있었다. 그날도 바로 전날 늦게까지 수업을 했기 때문에 별로 숙제를 해놓은 것은 없었지만 다시 한 번 기본적인 설명들을 해주는데, 오늘은 조금 감이 온다고 하니 그래도 조금 위안이 되었다. 이번에 성공을 못하고 또 맛만 보고 끝나 버리면 다음엔 또 더 어려워질 테니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사업에 약간의 차질이 있고 잠을 못 자는 한이 있더라도 철저하게 배수진을 치고 하루에 꼭 서너 시간을 컴퓨터와 씨름하라고 신신당부 하였다. 성패 여부는 좀 더 시간이 지나봐야 알 것 같다.
 
 
다음 날 아침 출근을 하니 우리 사장님이 어젯밤에도 저쪽 사장 컴퓨터 수업을 했느냐고 물으면서 부러워하신다. 그리고 자신도 좀 가르쳐 달란다. 그래서 우리 사장님도 다음 주부터 일과 끝나고 바로 컴퓨터 수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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